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쵸소카베 모리치카 (문단 편집) === 최후 === 오사카 성이 함락되자 재기를 노리고 도주했으나 5월 11일 교토에서 하치스카군에게 체포된다. 싸움에 패배하였음에도 할복하지 않고 사로잡힌 것을 도쿠가와 측에서 비난하자, '목숨은 아까운 법. 이 목숨과 오른손이 남아있기만 한다면, 이에야스와 히데타다를 이 꼴로 만들어 줄 수도 있다'고 하였다고 한다. 또한 '출가하여 중이 될테니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간청하였다고도 하나, 그의 재능과 간청 뒤에 숨겨진 뜻을[* 사회가 안정되는 치세 중기 이전까지 농민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아마 잠시 출가해서 숨어지내는 척하다가 대규모 농민반란이 터지면 그 때 환속하여 바로 반란군에 가담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안 이에야스는 후환을 없애고자 이를 거부하였고 모리치카는 5월 15일 교토 로쿠죠가하라에서 적남 [[쵸소카베 모리츠네]]를 비롯한 자녀들과 함께 참수되었다. 죽기 직전까지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였다고 한다. 토사로 도망친 차남과 삼남도 야마우치 가문에 의해 처형되었고 사남과 오남 또한 교토에서 처형되었다. 이로서 쵸소카베 직계혈통은 완전히 멸족된다. 이후로는 삼촌 [[시마 치카마스]]의 후손들이 시마 가문의 이름을 쓰며 토사번의 하급 번사로 [[메이지 유신]]까지 살아남았다. 메이지 유신 이후 쵸소카베 가문의 재흥을 허락받아 시마 치카마스의 후손들이 쵸소카베 가문의 당주 자리를 잇게 되었고, 현재의 당주 쵸소카베 토모치카 또한 치카마스의 후손이다. 유이 쇼세츠의 난에 가담한 창술가 마루바시 츄야가 모리치카의 사생아라는 설이 있다. 실제 사생아라 하더라도 츄야 역시 처형됐으니 멸족은 기정사실이다. 다른 몇몇 무장과 같이 모리치카도 오사카 전투에서 살아남았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의 경우는 혼간지 계열의 절에서 승려로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